시나리오 구경! [1] [2] [3]
시나리오를 많이 접하는 것이 시나리오 쓰는데 도움이 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히 보면서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라 잘 쓴 장면들을 보면서 감각을 익히라는 거죠. 영화속에서 본 장면들을 떠올리면 과연 어떻게 표현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머리속에 가지고 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시나리오 전문에서 제가 생각할 때 참 잘 씌여졌구나 생각되는 장면들을 한번 골라봤습니다. 이런 장면들을 스스럼 없이 써낼수 있을때 좋은 시나리오 작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첫번째 작품은 이민용 감독의 <개같은 날의 오후> 첫장면입니다. 시나리오는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경식, 조민호, 장진, 이민용씨가 함께 썼군요. 아직도 영화속에서 본 첫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는데 시나리오 상에서는 지문과 아나운서 멘트로 아주 적절하게 포인트만 살려냈습니다. 첫장면 치고는 상당히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한번 보세요!

1.프롤로그(낮)

(하늘에 보이는 도시의 먼 모습. 스모그가 뿌옇게 뒤덮여 흐릿한 도시를 향해 다가가는 카메라. 숨이 막힐 듯한 매연. 아스팔트의 지열속을 힘겹게 지나가는 인파와 차량들. 어디선가 들리는 아나운서의 기상소식)

아나운서멘트:"일요일 정오 뉴스입니다. 전국이 화끈한 찜통 더위에 갇혀있는 가운데 어제 대구에서는 수은주가 섭씨 40.2도까지 올라가 42년 8월1일에 기록한 40도를 53년만에 갱신했습니다. 또한 부산의 38.7도를 비롯, 전국의 기온이 36도 이상의 높은 기온을 보이고 있습니다.
두 달째, 계속되는 가뭄 역시 해방 이후 최악의 현상으로 하루 천 6백만평씩의 농경지가 타죽어 가는 것으로 계 분석되어 농작물들의 피해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 계속되는 이상 고온 현상에 대해 기상청의 한 관계자는, 가뭄의 원인을 평년에 비해 급격히 세력이 강화된 북태평양 고기압이 장마전선을 약화, 북상시킨 탓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열대 해양성 기단의 영향으로 인한 고온다습한 찜통 더위와 열대야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한편, 무더위가 계속되면서 전기 사용량도 연일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곳곳에서 변압기가 터지는 등의 사고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오늘 오전 정전 사고로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서울역까지의 구간이 한 시간 동안 불통되면서 환불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역사 유리창과 비품등을 부수며 소동을 벌였습니다. 관계당국에서는 가능한 한 에어컨이나 선풍기등의 전기제품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내용의 호소를 거듭 발표하고 있습니다만, 기온이 내려가지 않는 한 이런 사태는 앞으로도 더욱 많아져 시민들의 불편이 더욱 가중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아나운서 멘트 흐르는 가운데, 지열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위에 차들이 엉켜있고, 서로 삿대질을 하며 욕지거리를 퍼붓는 운전자들. 한 운전자가 상대의 차를 발로 차버리자, 스패너를 꺼내들고 상대의 유리창을 깨버리는 다른 운전자. 서로 멱살을 붙잡고 싸움을 해댄다. 뒤에 늘어선 차들의 신경질적인 경적음 소리. 그런 모습들을 지나 어느 공중전화 부스로 다가가는 카메라. 욕설을 퍼부으며 전화를 걸고 있는 한 남자. 뒤에는 30대의 여자가 초조한 듯 기다리고 그 뒤에도 두 사내가 더 있다. 남자가 전화기를 내려놓자 밀치고 들어가려는 여자. 남자는 무시하고 동전을 마구 집어넣는다. 여자가 심통이 나 남자의 등을 툭툭 치자 화를 내는 남자. 여자가 하이힐을 벗어 다이얼을 돌리고 있는 남자의 머리통을 후려갈긴다. 남자가 쓰러지고 부스에 오르는 여자. 남자가 벌떡 일어나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삥삥 돌리다가 바닥에 쳐박는다. 그 사이, 서로 먼저 걸겠다고 싸우는 뒤의 두 사내. 결국, 지나다 말리려는 사람들까지 합세해 집단 난투극이 벌어진다. 그런 모습위로 계속 이어지는 아나운서 멘트)

시작을 알리는 첫장면을 살펴봤으니 이번에는 마지막 엔딩장면을 볼까요? 이번 작품은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 입니다. 시나리오는 임상수, 박성조, 박종원씨가 공동작업을 했습니다. 심혈을 기울였을 끝장면일텐데 어떻게 썼나 한번 보죠.

119. 초가집 마당

(굵은 빗줄기가 퍼붓는다. 마당에 있던 개화하려던 꽃망울이 툭, 툭, 툭 떨어져 내린다. 방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120. 초가집 방 안

(이제 할말을 다한 듯 꼼짝 않고 있는 두 사람, 각각의 생각에 묻혀있다. 만감이 교차하는 정조의 얼굴. 이어 심환지의 얼굴. 다시 정조의 얼굴에서 길게 F.O 되면 블랙화면에 들리는 소리)

늙은인몽:"(소리) 그 몇 달 뒤 유월에 주상전하께서 갑자기 승하하셨다...그 분이 꿈꾸던 '영원한 제국' 역시 막을 내렸다"


121. 초가집 방 안

(방 문 햇살만으로 밝혀져 있는 방안. 무언가 적고 있는 늙은 노인이 그 햇살속에 드러난다. 그의 얼굴엔 한쪽 눈을 가르는 처참한 칼자국이 그어져 있다. 주름살 하나하나에 30년의 모진 풍상이 새겨진 인몽이다. 손이 떨려 글씨를 더 이상 쓸수 없자, 몸을 일으킨 인몽은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하얀 가루를 꺼내 담배를 만든다. 불을 붇이고 길게 한모금 빨아들이고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 그 옆방에서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1:"(소리) 증자 왈, 사불가이 불홍의니 임중이 도원이니라"
(자막-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야 할 것이니 그 책임은 무겁고 멀기 때문이다. 열린 방문으로 꾀죄죄한 산골 학동들이 보인다. 장난을 치고 있던 아이들, 인몽과 눈길이 마주치자 움찔 자세를 바로한다. 글 읽던 아이 또한 다시 소리를 가다듬는다)

아이1:"인이위기임이니 불역중호아 사이후이니 불역원호아"
(자막-어짐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뒤에나 말 것이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

(그 소리를 들으며 쓰던 글을 멈추고 회한에 젖는 인몽. 다시 먹을 갈아 글쓰기 시작한다. 문틈으로 선생 눈치 보며 아이들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늙은인몽:"(소리) 하늘과 땅 사이 뜬구름 같은 내 머리는 백발이 되었다. 이제 이 종이에 적은 쓸쓸한 말들은 모두 30년 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그날의 기록이다. 이 글이 후세에 전해져 혜안을 가진 선비가 어지러운 이 글 속에서 옳고 그름을 가려만 준다면 미천했던 한 선비가 조금이나마 짐을 벗을까 한다"

(다시 몸을 굽혀 글을 쓰는 인몽. 그의 뒤쪽 창문으로 봄 꽃들이 화창하게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그 대자연 속에 조금 전 학동들이 티없이 밝게 노닐고 있다. 한폭의 그림처럼. 여기에 Credit Title이 오른다)

<끝>

다음 장면은 김영빈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테러리스트> 의 한장면입니다. 아주 짧은 씬인데 함축적인 대사가 상당히 멋있게 느껴지는군요. 자! 보시죠.

18. 동두천 삼거리(아침)

(수현 앞을 보면, 자동차 보닛에 기대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현.
말없이 와서 서는 수현)
사현:"(잔 건네며) 마셔라"
수현:"..."
사현:"잘 들어둬라 수현아"
수현:"..."
사현:"앞으로 그 잔에 술을 채워줄 수 없을거다"
수현:"..."
사현:"누구도 그 잔에 채워주지 않을지도 몰라"
수현:"..."
사현:"오직 너만이 채울 수 있다. 네 앞에 놓인 인생처럼..."
수현:"..."
사현:"오른쪽으로 가면 경찰서고 왼쪽엔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이 선택은 형이 네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간다"
(떠나가는 사현의 자동차를 오랫동안 보는 수현)


top